| 살아있는 것은 움직인다. 살아있지 않은 것은 어떤 자극에도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력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운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운동하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도 결코 멈춰있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운동하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비록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죽은 것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이 반드시 움직여야하는 것은 아니다. 움직이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거나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이어도 되니 말이다. 우리는 키네틱 아트를 매우 표피적으로만 수용해 온 것 같다. 움직이는 예술은 보다 적극적인 예술을 향한 예술가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지 개인적 기호나 그때그때의 호기심의 문제에 한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대표적인 초기 키네틱아티스트인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조각가인 팅글리(Jean TInguely 1925-1991)의 움직이는 조각은 인류 문명과 정신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예술가들이 결코 예술작품이 자연에 의해서건 인력에 의해서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 이전까지 정지해 있던 예술에 대한 비평을 담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키네틱아트가 언젠가부터 아이들과 일반 시민들이 쉽고 용이하게 즐기기 위한 목적이나 미술관의 관객개발의 용이한 수단으로 인식되어 온 것은 기이한 현상이다. 이런 이상한 현상이 키네틱아트의 경우에만 특별히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중매체에 의해 다양하게 번안되고 왜곡되어온 수많은 예술현상과 예술 개념의 한 예일 것이다. 그러므로 키네틱 아트를 인류문명과 정신문화에 대한 매우 중요한 도전이자 모색으로 진지하게 바라보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한 현실이다. 일상은 예술과 쉽고 즐겁게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안수진 작가는 밀레니엄을 전후로 급속하게 확대되어 온 한국의 현대미술 현장에서 오랫동안 예술과 운동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통한 한국의 사회현실과 문화를 이해하고 비평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우리 미술계에서 안수진의 키네틱 아트가 보여준 매우 예외적이며 독자적인 연구와 작품 활동은 후배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자극제가 되어 현재 상당한 수의 젊은 키네틱 아티스트가 활동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안수진 작가는 매 전시를 통해 키네틱아트가 기술이나 아이디어의 차원을 넘어 사회현실과 인간 의식의 문제를 향한다는 것을 제시해왔다. 밀레니엄이후 다원예술이니, 융합이니 하며 예술과 과학, 기술 등이 결합하는 예술이 유행처럼 확산될 때에도 안수진 작가는 그러한 외부의 변화와 관심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작품이 지속해온 예술과 운동이 왜 만나야하는지, 예술에서 운동은 어떤 성격을 지니며, 그것이 도대체 우리의 삶과 일상현실에 어떤 영향관계가 있는지 질문하고 숙고해왔다. 무엇보다 작가는 키네틱아트를 통해 예술의 존재이유를 운동과 운동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우리의 삶과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지 아니면 오히려 거꾸로 규정해왔는지 질문을 통해 제시한다. 속도와 운동이 절실하지 않았던 사회에서 근대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급변하는 과정에 속도와 운동, 그와 관련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변하였고 또 그것은 어떤 의미인지 비평하는 것이 안수진 작가의 키네틱 작품들이 담고 있는 중요한 미학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영원성을 미덕으로 삼는 고전적 또는 주류 예술관에 가장 근본적인 비판으로 순간순간 존재하고 사라져버리는 운동 과정 중인 예술작품이란 얼마나 전복적인가. 결코 기존의 숭고한 미술관제도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 비례, 조화와 같은 전통적이며 하나의 규범으로 환원되는 예술에 대한 통념을 비판하고 있다. 안수진의 키네틱아트에는 70년대를 지나며 축적되어온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인식과 문화의 충돌, 욕망의 운동, 농담처럼 던지는 예술의 위트 등이 복선으로 깔려있다. 고도자본주의의 산업사회에서 과학과 기술, 기계의 미학은 어떠해야하는 지 작가는 반문한다. 그런 점에서 재기발랄하고 흥미로우며 유쾌한 키네틱아트가 점차 늘어나면서 안수진 작가의 키네틱의 문제에 대한 성찰과 창작 활동은 더욱 우리의 주의를 요한다. 이번 현대자동차남양연구소에서 개최하는 안수진작가의 개인전은 한국자동차산업의 핵심인재들과 함께 키네틱아트를 경험하고 생각하는 자리인 동시에 한국 과학기술과 기계미학의 중심에서 예술과 과학, 기술, 기계, 동력이 비판적으로 융복합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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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변주』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시의 첫 구절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무심코 지나가는 말이거나 심심풀이로 해본 말, 우리가 말하기 전에 말은 제 빛깔과 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시의 둘째 구절은 무염수태(無染受胎), 교미도 없이 첫 구절에서 나왔지만 빛깔과 소리는 전혀 다른 것. 시의 셋째 구절은 근친상간, 첫 구절과 둘째 구절 사이에 태어났으니, 아들이면서 손자, 딸이면서 손녀. 눈 먼 외디푸스를 끌고 가는 효녀 안티고네. 말들의 혼례가 끝나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우리는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성복) # 조각에서 회화로 키네틱 작가로 알려진 조각가 안수진이 『시간의 변주』라는 제목으로 6년 만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전시 제목과 같은 작품인 「시간의 변주」 이외에는 움직이는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도 그가 과거에 제작했던 키네틱 작품과 비교하면 규모와 형태 그리고 움직임 모두가 극도로 간결하다. 이 작품을 빼고 전시작품 거의 다는 모두 벽에 거는 작품인데, 회화나 조각으로 분류하기가 애매하다. 아무튼 그동안 키네틱 작가 안수진이 보여줬던 작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변주는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ㆍ리듬ㆍ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함, 또는 그런 연주”를 의미한다. 전시작품 가운데 유일한 키네틱 작품인 「시간의 변주」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봐서 이 작품이 전시작품들의 모티브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작품 제목으로 봐서- 시간의 어떤 특성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각각의 작품 제목은 ‘just around the corner’, ‘8월에서 10월까지’, ‘황사’, ‘선잠’, ‘바나나껍질’, ‘사분의’, ‘철 지난 패션(passion)’, ‘경계 체크’, ‘로딩 중’, ‘에둘러 돌아온 길’, ‘정중한 거절’, ‘바람의 좌표’처럼 전시 제목인 ‘시간의 변주’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더욱이 조각가인 안수진은 이례적으로 전시작품 모두를 채색했다. 물질을 직접 가공해서 형상을 제작하는 조각의 장르 특성으로 인해서, 조각가 대부분은 인위적인 채색보다는 재료의 원래 색을 선호한다. 따라서 조각가가 작품에 채색하는 것은 물성을 중시하는 조각 전통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면 이번 전시는 그의 30년 조각가 이력에서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각가 안수진이 회화 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 주의 깊게 그의 작업 여정을 살펴본 관객이라면, 6년 전 갤러리 지오타에서 개최한 개인전을 특별하게 기억할 것이다. 이전 전시와 달리 그는 회화 작품을 포함한 평면작품으로 전시회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이 전시를 개최하기 2년 전인 2014년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앞으로 조각보다는 회화에 집중하려고 한다고 했다. 조각가인 그가 회화로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은 회화의 완결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아무리 잘 만든 조각작품이라도 공간에 특정한 사물로 생뚱맞게 나 홀로 있지만, 회화 작품은 선 하나만 그어 액자에 끼워 벽에 걸면 완성된 작품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각은 회화와 비교해서 완성까지 재료의 물성에 순응해야 하며,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처음 작품에 임할 때 느낌을 끝까지 지속하기가 힘들다. 무엇보다도 즉각적인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이러한 조각의 한계 혹은 특성을 재고하기 시작했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 사회적 이슈, 키네틱 안수진은 소위 말하는 86세대 작가다. 그 세대는 얼마 전부터 정치권에서 비롯되어 한국 사회의 ‘꼰대’가 되었고, ‘내로남불’이 그 세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처럼 86세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86세대 작가임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작업 여정을 이해하는데 불가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수진은 군 제대 후 복학해서 1990년 졸업할 때까지 1986년 6월 항쟁 이후 ‘87년 체제’의 성립과 88서울올림픽,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국내외의 정치적, 이념적 혼란기를 거쳤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한국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었으므로 미술시장도 나날이 커졌다. 일례로 1988년 『계간미술』이 『월간미술』로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해외여행과 유학 자유화가 시행되어 동시대 서구 미술이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한편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이념대립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세계화가 급속도 진행되면서, 국내 미술계도 서구 모더니즘 계열과 민중 계열의 논쟁을 뒤로하고 세계화를 지향하며 시장 중심으로 급격히 전환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구 동시대 작가들 작품이 국내에서 전시되기 시작했고,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비엔날레 공화국이 되었다. 이런 급변기에 안수진은 1990년 대학 졸업과 함께 작가로 데뷔했다. 안수진은 1991년 『로고스 & 파토스』에 참여했고, 특히 1992년 금호미술관이 개최한 『가설의 정원』이라는 기획전에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하며 키네틱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가 『로고스 & 파토스』라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으로 동시대 서구 미술 담론에 천착하는 청년 작가들 중심으로 결성한 그룹 활동에 참여했다는 점과 키네틱과 영상을 결합한 작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혹자는 그를 시류에 민감한 작가라고 예단할 수도 있다. 청년 안수진이 그러한 성향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는 세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였다. 그는 알고리즘을 통해 움직임을 제어하는 키네틱 작품에 사회적인 이슈를 담아 일종의 블랙코미디 같은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그는 작가 노트에 자기가 어떤 이유에서 키네틱 작업을 하는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작품이 작동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마력으로 다가왔다. 미래파, 구성주의, 다다로 이어지는 조각에 있어서 시간성의 문제와 기술에 천착은 있었지만, 내가 이를 주목한 것은 ‘서사’를 표현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한마디로 안수진은 움직이는 작품이라 신기함으로 주목받기보다는 그러한 신기함을 통해 관객과 함께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고자 했다. # 서사에서 형식으로 그동안 안수진의 키네틱 작품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작품이 단아해졌다는 점이다. 초기작 「그리스도」와 이번 전시에 유일한 키네틱 작품인 「시간의 변주」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두 작품 사이에는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음으로, 변화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상과 더불어 움직임을 제어하기 위한 온갖 기계장치와 구조물로 인해 규모가 상당했다. 하지만 「시간의 변주」는 상대적으로 무척 단아하다. 단지 중첩된 두 개의 아담한 정사각형 판재가 묘한 움직임을 반복할 따름이다. 또 다른 변화는 구체적인 소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는 2018년 작인 「갈림길」과 2021년 작인 「고도를 기다리며」에 ‘안경’을 소재로 사용하였다. 그는 안경의 움직임을 통해 이 시대 시류에 민감한 지식인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시간의 변주」는 단순히 두 개의 정사각형만이 중첩해 천천히 움직일 따름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전시작품의 모티브는 키네틱 작품 「시간의 변주」다. 두 개의 사각형이 중첩된 작품이므로 형태상으로는 사각형이 모티브라고 할 수 있겠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시작품 중 최근에 제작한 작품은 다양한 판재를 사용해서 같은 형태를 여럿 만든 후 조립해서 채색했다. 그는 미니멀리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던 하나의 유닛을 복수로 나열하는 방법과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미니멀리스트적인 어법으로 제작한 작품이 한편으로는 옵티컬 회화 작품을 입체화했다는 느낌이다. 주지하다시피 옵티컬 회화 작품은 착시효과를 이용하여 관객이 어떤 운동감을 시각 체험하게 한다. 바꿔 말하면 옵티컬 회화 작품이 지향하는 바는 평면을 키네틱화 하는 것이라 하겠다. 과거에 그는 서사에 방점을 두고 수단으로 키네틱 작품을 제작했다면, 지금은 형식주의적인 관점에서 키네틱 효과를 지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그의 관심사는 서사에서 형식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안수진의 작품은 시각적으로는 미니멀리스트의 형식주의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작업처럼 보임에도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 미니멀리스트들에게 작품은 특정한 사물일 따름이다. 하지만 안수진은 각각의 작품에 구체적인 제목을 부여했다. 작품에 제목이 부여되면 관객은 제목을 의식하게 되고, 작품을 제목에 맞춰 감상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작품들은 제목을 토대로 작품을 감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가 오랜 시간 키네틱 작업에 집중했던 이유가 작품에 이야기를 담는 데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제목과 형태의 부조화는 어떤 의도에서 비롯된 전략적 선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성찰-미니멀리즘, 형이상학 안수진도 어쩌다 보니 세상사에 열광하기보다는 차분히 성찰할 나이가 되었다. 몇 해 전 그는 앞서 인용한 이성복 시인의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를 소개한 한 일간지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세상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작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회의하는 그이기에 신문에 소개된 이 시와 시에 대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의 해설을 읽으며 ‘바로 이것이다.’라며 전적으로 공감했다고 한다. 그래 권혁웅이 어떻게 해설했는지 원문을 찾아 읽어봤다. “시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하는 법을 말해주는 시다. 시는 할 말(주제)을 정해두고 시작과 중간과 끝(구성)을 궁리해두고 논리에 맞게 적어가는 글이 아니다. 그건 연사이거나 변사의 문법. 시는 무심하거나 심심한 말, 그냥 거기에 있던 세상의 말 하나에서 시작된다. 그 말이 아비도 없이 새끼를 친다. 그래서 시는 신화와 닮았다. 세상이 있으니 누군가 그것을 낳았을 것이다. 이 ‘낳는 이’를 대지모신이라 한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가 ‘낳은 이’인 자식과 짝을 이루니 이것이 근친상간이다. 시의 수태고지란 이 시의 진짜 주인이 시인 자신이 아니라는 통지에 지나지 않는다. “신이여, 정녕 이걸 제가 썼단 말입니까?”라고 감탄하는 시인에게 신이 대답하신다. “에이, 설마….” 대구 사는 큰 시인께서, 통 크게 영업 기밀을 누설하셨구나.“ 이 해설을 읽으며 그림그리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는 ‘繪事後素’(회사후소) 즉, ‘흰 바탕이 있은 다음에 그림을 그린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공자가 제자 자하와 禮에 대해 논하다가 한 말이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많이 인용되어 한국화 단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후소회(1936~ )가 여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화가도 사람인지라 그림그리기 시작할 때는 무엇을 그리겠다고 뜻(흰 바탕)을 앞세우나, 일단 그림이 시작되면 처음 뜻에는 얽매이지 않고, 매 순간 직관에 따라 그리게 된다. 아마 서예에서 결구를 중시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하겠다. 따라서 최종 완성작이 어떻게 될지는 작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 대략 결과는 예측할 수 있지만, 의외의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의외의 작품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그 결과 기존 미학에서 비롯된 비평언어로 판단할 수 없는 작품이 등장하기도 하여 후배 화가들의 사고의 지평을 넓히기도 했음을 미술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쿠르베와 마네가 그랬고, 세잔이 그랬다. 물론 뒤샹도 그러했다. 그래서 지난 세기 서양의 많은 철학자가 그림을 사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것이 그림그리기의 묘미이다. 아마 안수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 시와 해설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글을 위해 안수진과 인터뷰하며 그가 자기 경험을 매우 구체적으로 진솔하게 설명하는 것에 놀랐다. 대학 졸업 후 작가로 데뷔하던 1990년대 그는 외국 작가 작품, 특히 제임스 터렐 작품을 처음 봤을 때의 경이로움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었다. 경이로움의 핵심은 터렐의 작품이 아주 미니멀함에도 ‘간단한 트릭 하나’로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점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그는 미니멀아트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작품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이해한 미니멀리즘의 정수는 ‘미미한 인간이 끝없는 우주에 놓여 무한함을 느껴보는 것’이었다. 문제는 회화가 아닌 조각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였다. 안수진은 첫 번째 실험작품으로 2005년도에 다빈치가 그린 3개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을 조합해 제작한 「평면의 시간」이라는 작품을 제작 전시했다. 3개의 비트루비우스는 각각 서울, 나이로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GPS 신호로 연결되어 현지 시각에 맞춰 하루에 한 바퀴 돌게 계획된 작품이다. 하지만 그는 기술, 장비, 그리고 재원의 한계로 원하는 움직임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할 수 없었고, 그러던 중 점차 세태에 관한 관심이 커지며 작품에 담고자 하는 내용에도 변화가 생겼다. 형이상학을 지향하고자 했으나 형이하학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형이상학에 대해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 시간의 변주-다시 조각으로 안수진은 2015년에 대구 봉산 문화 회관에서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키네틱 작품만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는 작가 노트에 자기 작품을 ‘움직임의 시학(詩學)’ 또는 ‘시적(詩的) 장치’라고 했다. 그는 키네틱으로 한 편의 시를 쓰고자 했고, 조각하는 시인이 되고자 했다. 이 전시에 그는 「작업자」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작업자」는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지고 그 무게를 감당하며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키네틱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번 전시 제목의 작품인 「시간의 변주」도 함께 전시했다. 두 작품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람과 사각형이라는 소재의 차이이다. 또 다른 점으로는 어법의 차이다. 관객은 「작업자」라는 작품 명제를 염두에 두고 알고리즘에 의해 정해진 사이클을 반복하는 움직임을 살펴보면서, 작가의 생각을 별 어려움 없이 추론해 볼 수 있다. 반면에 「시간의 변주」는 그렇지 않다. 이론물리학에서나 있을 법한 시간의 변형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즉 「작업자」가 구상이라면 「시간의 변주」는 비구상이라 하겠다. 지오타 전시는 이번 전시와 거의 같은 내용과 형식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단지 회화 작품을 주로 해서 전시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회화에 관심을 가졌던 안수진이 다시 조각적인, 아니 입체적인 작품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생경한 제목을 제시하여 관객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아마도 그가 이러한 작품을 전시하는 이유를 그가 크게 공감했던 이성복의 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86세대 작가 안수진은 이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라고 본다. 과거 그는 자기보다는 세태에 관심을 가졌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그는 여전히 세태에 눈이 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거리를 두고 자신에게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한 시도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 타자에 의해 규정된 프레임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 남들이 부르는 안수진이 아니라 자기가 부르는 안수진이 되고자 한다. 앞으로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지금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춘호 (문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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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의 시간. 도움을 주신 과학자 : Kist 유범재 박사님, 대전 천문 과학원 임형철 박사님 작동원리 ; 세개의 원형 인물상이 아주 천천히 하루 한번 좌우로 왕복 운동을 하여 다빈치 상의 수직 각도를 변화시킴. 작품의 개념: 상상해 보라 내 눈앞에 한사람이 서 있다. 그는 지표면에 두 다리를 딧고 당당하게 수직적으로 서 있다. 이 모습으로부터 끝없이 Zoom out 하여 우주 공간에서 다시 조망해보면 조금 전 그 사람은 원형의 지구위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다시 천천히 돌고 있는 지구를 상상한다. 지구는 동그란 형태를 하고 있으며-사실은 찌그러진 타원형이지만- 상층부 지구 회전축을 중심으로 한 평도 되지 않는 땅위에 서있는 단 한사람만이 천천히 지구와 함께 돌고 있고 그는 좌나 우로 편향되지 않은 그대로의 중심을 잡고 서 있다. 그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24시간 비행 해야지만 갈수 있는 지구 한바퀴의 거리를 단 한걸음에 돌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위치를 잡고 서 있는 사람으로 60억 인구 중에 단 한 사람 만이 온전한 수직성을 견지 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권력적이다. 이것이 작업의 시작 이다. 이번작업은 A4 용지 위에 그려진 착시와 넌센스에 기반 한 공상이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상상실험과도 같이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어떤 조건 속에서 아주 간단하게 스케치북을 펴고 그 위에 지구의 도상과 직립한 인간을 상정한 단순한 그림에서부터였다. 세상에는 상식적인 지식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 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구는 둥글다'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원형의 형태이며 그 위에 살고 있는 인류는 마치 솔방울의 가시처럼 지구표면에 붙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나는 도통 실감을 하질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갈릴레오 나 코페르니쿠스 선생의 선각자적 업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울러 우주의 시청각 자료를 보고도 그 믿음이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 뭐랄까 이를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나의 시야각이 너무 좁은 것 같다. 우주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처음 하던 고대인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수직적으로 자신이 딛고 선 땅에 수직적으로 서있었을 뿐 단 한번도 기울어진 적은 없었다. 물론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여행을 해본 우주인들은 제외될 것 같지만 그들도 기록화면을 보면 자신들이 대기권을 벗어나면서 차츰 수평선이 원형으로 변해가는 광경을 볼 수는 있지만 지구가 거대하게 직선에서 원형으로 변해가는 엄청난 광경 앞에서 지구는 방금 전 자신이 딛고 선 그 땅이 아니라 거대한 한 객체를 확인하는 것이리라 상상해 본다. 그 것의 이름이 지구일 뿐 동구 밖에서부터 확인한 친근한 고향집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정작 예외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자신보다 서너 배 큰 별에 살던 '생 덱쥐베리의 어린왕자'쯤 일까? 이번 작업은 우리들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직성과 실제적(과학적) 수직성 간의 각도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과 이 도시의 대척점에 있는 ‘아루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리고 적도 근처의 ‘케냐의 나이로비’를 기준으로 각도시의 지구 자전운동에 의한 위치 각도의 변화를 나타낸다. 가령 서울은 시계방향으로 104도를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110도를 ’나이로비‘는 시계반대방향으로 177도의 각도를 하루 1번 왕복하게 되는데 이는 실시간으로 기준각도인 지구 공전축의 각도 즉 0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작품과 관람자 간의 각도차가 과학적 세계와 심정적 감각 사이의 차이를 의미 한다. 그러나 이 각도 계산은 정확한 3차원 공간을 구현하기 보다는 직립성과 수직성만을 작업의 개념으로 삼은 관계로 공간 좌표 중 y축만을 표현하였다. 이는 고대인의 시각에서 끝없이 널은 세계 (수평성) 와 대면하고 있는 외로운 단독자의 주체성-자신의 좌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준을 상정 할 수밖에 없는 상대적 관점보다는 더 멋지지 않은가? - 을 부각시키기도 하면서 우리가 매 순간 부딪치는 일상_자신이 지구에 매달려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 과도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역설적으로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인식의 평면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그 거대한 스케일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그 엄청난 질량 앞에서 모든 것은 휘어지듯이 정확히 자신이 서있는 좌표의 심도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물리적 시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과학적 증거와 감각 사이에서 또 다른 세계관을 인간은 끝임 없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Time Within Planes This work is a kinetic device that displays real-time ‘angular changes’ between the verticality that we perceive emotionally (a basic human sense) and real (scientific) verticality. Based on Seoul and its antipode, Buenos Aires, and Nairobi which is located near the equator, it shows the changes in locational angle caused by the earth’s rotation. This sculpture is, in a way, an ‘angle gauge’. Seoul makes one complete rotation clockwise to 104 degrees, while Buenos Aires reaches 110 degrees and Nairobi reaches 177 degrees. These all point towards the standard angle in real-time which is the axial tilt or 0 degrees, and that angular difference between the sculpture and the audience shows the ‘change’ between the scientific world and our emotional senses. However, this angular calculation only displays the y-axis rather than creating an accurate 3-dimensional space because straightness and verticality are the main concepts of concern for this sculpture. This highlights the idea of a lone individual’s identity standing against the endless world (horizontality) in the eyes of an ancient being - isn’t it more admirable to bring in one’s own standards to justify one’s coordinates rather than applying someone else’s perspectives? Furthermore, it also conforms with our mundane lives we encounter daily every second - nobody would ever think that they were hanging on to the Earth. Such thoughts also paradoxically indicate how we perceive the world from a plane viewpoint. The massive scale of the world including Earth goes beyond human imagination and as everything becomes twisted against such mass, no human is most likely able to accurately feel one’s own coordinates. Humans cannot comprehend the world from a dimensional perspective. I believe that is why mankind endlessly create their own worldviews that lie between scientific evidence and sensory factors. |